※ 이 글은 열전마의 현역 당시 마령 표기에 따라 구 연령(세는 나이) 표기를 사용합니다.
『연회가 끝난 뒤』
일본 더비 이후 아이네스 후진은 방목을 위해 떠났다. 더비를 격주했던 말이 이 시기에 방목을 떠나는 것은, 봄의 피로를 풀고 가을을 위해 기력을 얻기 위한 것으로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방목의 뒤편에는 아이네스 후진의 다리 부분의 불안이 있었다. 더비에서 격주한 아이네스 후진의 다리는 영광과 맞바꿔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역시 더비에서 일생일대의 대도주는 아이네스 후진의, 아니 서러브레드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일까.
아이네스 후진은 가을에 일단 미호 트레이닝 센터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목에서 돌아온 아이네스 후진은 역시 뭔가 이상했다. 달리기에 예전과 같은 경쾌함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킷카상 (G1)을 위한 마지막 조교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속도를 냈던 아이네스 후진은 마침내 굴건염이 발병하고 말았다.
실은 나카노 기수에게 있어서 이 고장은 완전히 예상외의 사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더비 후, 안장 위의 나카노 기수는 2400m를 질풍이 되어 달려나간 아이네스 후진이 이제는 힘을 다 써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더이상 뛰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스탠드에서는 약 20만 명의 대관중이 제 57대 더비마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위닝 런에서 추태를 보여줄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카노 기수는 정면 맞은편에서 극한에 달한 아이네스 후진의 피로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한의 피로가 다리 부분의 불안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오랜 기수 생활 속에서 잘 알고 있었다. 레이스 후의 그가 아이네스 후진의 다리에만 신경을 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카노 기수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바람처럼 사라지다』
다행히 아이네스 후진의 굴건염은 비교적 가벼운 것으로, 수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복귀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산지에서는 이 해 아이네스의 후진의 아버지 시 호크가 사망했고, 후계 종마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극히 높았다. 시 호크의 후계로는 그 외에 몬테 프린스, 몬테 패스트라는 천황상마 형제, 그리고 이듬해부터 종마 생활이 예정되어 있던 전년도의 더비마 위너즈 서클이 있었지만,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와 일본 더비를 레코드 타임으로 도주할 정도로 고도의 스피드와 스태미나를 겸비한 아이네스 후진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주목도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또 당시 일본 마산계에서는 노던 댄서 계의 번식 암말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는데, 노던 댄서의 피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네스 후진은 이들과 교배하기 매우 쉽다는 배경도 있었다. 그의 피를 찾는 마산지의 목소리는 관계자들에게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이네스 후진은 일본 더비에서의 치열한 도주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기고 그대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그 현역 생활은 약 1년에 불과했다. 그는 질풍처럼 잔디를 떠났던 것이다.
G1 경주 2승, 특히 더비는 경이로운 레코드로 제패한 질풍의 도주마의 은퇴 시기에 은퇴식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카토 조교사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이네스 후진은 마장에 나오면 달려야 한다고 생각해 휙 하고 가버리는 말이다. 다리가 나빠서 은퇴하는데, 진심으로 달리가다 다리라도 부러진다면 돌이킬 수 없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전해진다.
『종마 아이네스 후진』
일본 더비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아이네스 후진은 총액 9억엔의 신디케이트*가 짜여지며 높은 기대 속에 종마가 되었다. 국내산 종마의 동기로는 오구리 캡, 슈퍼 크릭, 이나리 원의 「헤이세이 3강」을 시작으로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지만, 그들이 현역 시대의 실적에 비해 산구가 달리지 않아 크게 고전하는 가운데 아이네스 후진은 화려함은 없어도 확실하게 실적을 내고, 또 오래 활약하는 산구를 배출했다. 산구가 아이네스 후진 자신과는 달리 잔디보다는 더트, 중장거리보다는 단거리에서 달렸다는 점은 예상 외였지만, 좋지 않은 말을 배출하지 않고 예상이 잘 되는 아이를 배출하는 아이네스 후진의 종마로서의 인기는 안정적이었다. 아이네스 후진의 교배 신청은 순조로웠고, 매년 50~60마리의 교배 상대를 확보하는 해가 이어졌다. (* 종마에 대한 주식의 개념과 같다. 수십 주로 나누어 주주에게 분배되고, 1주 당 1마리와의 교배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종마 세계의 생존 경쟁은 치열하다. 안정적인 성적을 남길 뿐 거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종마의 인기는 역시나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네스 후진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우승열패*의 힘겨운 싸움 속에서 아무리 더비마라도, 아무리 안정적인 아이를 배출해 내도, 대표산구가 아오이 스테이크스 (OP), 키타큐슈 단거리 스테이크스 (OP) 우승의 이사미 사쿠라여서는 평생의 안락을 쟁취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어 아이네스 후진의 종부료는 점차 하락했고, 번식 암말의 질도 떨어졌다. 그리고 1997년에는 마침내 아이네스 후진의 종마생활을 지탱해야 할 신디케이트가 해체되고 말았다. (* ≒ 약육강식)
『바람』
신디케이트의 해산이 불가피해졌을 무렵, 아이네스 후진의 관계자는 아이네스 후진이 종마로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 새로운 행선지를 찾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이네스 후진이 아직 마산지에서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은, 소문을 듣고 아이네스 후진을 종마로서 인수하고 싶다는 오퍼가 여럿 있었던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아이네스 후진은 1998년에도 약 20마리의 암말과 교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적 이야기는 전부 도중에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아이네스 후진의 현역 시절 마주였던 코바야시 마사아키 씨와 카토 조교사, 그외 관계자들이
「더비마를 행방불명되게 할 목장에 맡겨서는 안된다」
라고 아이네스 후진의 노후를 확실히 보장할 수 있도록, 오퍼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아이네스 후진은 아사히배를, 그리고 더비를 레코드로 도주할 정도의 명마이니 그냥 상품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노후를 포함해 제대로 돌봐줄 수 있는 목장이 아니라면 맡길 수 없다」
라는 것이 아이네스 후진 관계자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요구하는 자, 요구되는 자』
그리고 아이네스 후진 관계자들의 바람에 응해줄 수 있는 목장이 드디어 발견되었다. 그 목장은 과거 트윈 터보를 맡았던 미야기 현의 사이토 스터드다. 사이토 스터드에서는 트윈 터보가 급사해 그 후계가 되는 종마를 찾고 있었다.
지인을 통해 아이네스 후진을 인수하는 의향을 물었던 사이토 스터드의 사이토 요네조 씨는 아이네스 후진의 종마 성적이나 교배 횟수를 조사하고 이렇게 느꼈다.
「이 정도의 말을 이대로 재야에 놔둘 수는 없다」
사이토 스터드도 생활이 걸려있는 이상, 장래성이 없는 종마를 인수할 수는 없다. 아이네스 후진의 홋카이도에서의 인기는 하락세이며, 그걸 만회하기는 계속 어려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야기라면... 종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이라면 그 실적, 그 혈통 배경은 종마로서의 장래성은 아직 풍부하지 않은가. 쇠퇴하고 있는 미야기의 마산에 활력을 불러 일으킬 새로운 바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네스 후진은 사이토 씨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토 스터드는 아이네스 후진 측의 요구도 충족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사이토 스터드는 근방에서 동물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목장이며, 목장에서는 말 외에도 개나 고양이도 기르고 있다고 한다. 동물들은 모두 어떠한 이유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쉽사리 죽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소박한 감정이야말로, 사이토 스터드의 원점이었다. 아이네스 후진을 위해 최고의 행선지를 찾고 있던 관계자는 사이토 스터드를 보고, 사이토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점차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라면 아이네스 후진을 맡길 수 있어...」
이렇게 쌍방의 요구가 일치해, 아이네스 후진의 미야기 이적이 결정되었다.
『신세계』
사이토 스터드로 이동한 아이네스 후진은 경쟁하는 종마가 거의 없는 지역의 종마이기도 해서 20마리 전후의 번식 암말을 모았다고 한다. 이건 홋카이도에서는 큰 숫자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마산 규모가 작은 미야기 현이나 그 인근 지역에서는 대단한 숫자다.
게다가 아이네스 후진이 미야기로 떠난 후, 아이네스 후진 산구 중 한 마리인 패스트 프렌드가 갑자기 교류 중상 전선에서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99년 돌연 더트계에 씩씩하게 나타나 교류 중상을 휩쓸고, 2000년에는 제왕상(전국 교류 G1), 도쿄대상전(전국 교류 G1)도 제패한 명암말의 존재감은 상당히 커, 아이네스 후진이 이동하기 전의 스터드에는 아이네스 후진이 미야기로 이동한 것을 몰랐던 생산자들로부터
「올해는 아이네스 후진을 붙이고 싶다」
라는 신청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한때는 종마로서 홋카이도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여생은 사이토 스터드에서 보냈다.
『질풍, 멎는 일 없이』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아이네스 후진의 한편에서는 슬픈 화제도 있었다. 아이네스 후진의 현역 시절 마주이자, 신디케이트 해산 시에는 카토 조교사 씨와 함께 분주했던 코바야시 씨는 아이네스 후진의 이동을 지켜본 후의 1998년 2월 본업의 경영파탄으로 인한 자살의 뉴스가 일반지에까지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아이네스 후진을 소유한 걸로 마주가 된지 불과 3년째에 「일국의 총리가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더비마의 마주가 되는 행운을 얻은 코바야시 씨였지만, 그 후는 소유마가 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기의 악화로 인해 본업 쪽이 기울어져 갔다고 한다. 그 종착점은 더비 제패로부터 불과 8년 후였다. 코바야시 씨가 아이네스 후진의 행선지를 필사적으로 찾은 배경에는, 코바야시 씨가 생전 그 날이 올 것을 예감한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코바야시 씨는 아이네스 후진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그 말이 달리는 방식은 제게는 너무 외로워 보입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서... 비장함이 감도는 것처럼 보여요」
─아이네스 후진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가 가능한 은혜 갚기는 인간을 위해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달리기는 그런 생각 때문에 인간의 눈에서는 비장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네스 후진은 2004년 4월 5일 사이토 스터드에서 장염전을 일으켜 사망했다. 인간을 위해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달려나간 아이네스 후진은 그 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곳에서 충실히 살아가, 천수를 다한 것 같다. 패스트 프렌드 이후 더한 거물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면서도 사람을 돕고, 사람에게 도움받으며 생을 다할 수 있었던 그는 아마도 정말 행복한 서러브레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네스 후진이 없어진 뒤에도, 일본 더비의 계절이 되면 그를 떠올리는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이네스 후진의 일본 더비는 단순한 하나의 레이스가 아니라 「일본에서 경마가 도박에서 스포츠로 바뀌었다」는 계기였다고 이야기된다. 만약 경마가 도박인 채로 남아 있었다면 90년대 이후 일본 경마의 역사는 아마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고, 적어도 우리가 아는 역사만큼 화려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추를 질풍처럼 달려나가 「나카노 콜」을 일으키는 것으로 일본 더비, 그리고 일본 경마의 역사를 바꾼 아이네스 후진의 이름은, 그 제패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난 현대에서도 일본 더비와 함께하고 있다. 그 사실이야말로 아이네스 후진이라는 서러브레드의 위대함을 지금까지도 이야기해주고 있다.
※ 모든 열전은 원작자의 허락 하에 번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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